연고지

lifelog 2015. 4. 9. 07:02



잔인했던 캘리포니아는 J부부의 식사 초대로 희석되었다.


대충 먹겠다고 배만 채우면 된다는 나의 말에

J는 세상에 맛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귀한 한끼를 그렇게 보내냐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마운틴뷰의 아파트에 살다가 산마테오의 2층짜리 집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않아 아직도 집 정리가 다 안되었다는 양해도 더불어 받았다.

나는 와인 한병과 아이에게 줄 케익 한 상자를 들고 초대에 응했다.

평소 주택살이에 관심이 많은 나로선 그들의 스타코 플렉스와 테라코타로 마감한 집이 그렇게 따뜻하게 보였다.

사실,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외관과 인테리어였지만 분위기가 완전.. '아.. 정말 집이구나..' 생각하게 했다.

그 집과 이 도시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비용이 한달에 7-8000불인 것만 간과한다면 거의 동화였다.

안주인은 여성스러운 취향으로 앤티크 스타일의 그릇을 주방 벽 여러곳에 전시해두고 있었다.

나는 3년동안 요리용 전열기구를 한번도 안 켜 본 적도 있다. 

집에선 아무것도 안 먹었었다는 얘기도 되지만 누구도 초대하지도 않았다는 얘기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나는 그 집을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슨 잠만 자는 숙소쯤으로 여겼달까.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 도시에 대한 애착도 없다.



며칠이 지나 도착한 뉴욕에서, 대화 중 우연히 제이슨이 말했다.

'너 뉴욕 출신이잖아.'

이 말이 묘하게 기분을 좋게 했지만 사실은 아닌지라 좀 난감해서 

'난 아주 잠깐 산거지. 여긴 우리 집이 없잖아.'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여기 니가 전화만 하면 저녁 약속을 미루고 달려 올 많은 친구들이 살고 있고, 뉴욕에 올때마다 니가 머물 수 있는 내 집이 뉴욕에 있는 너의 연고지야.'


저녁식사 후 제이슨과 그녀의 남편 빅과 함께 본 쿵푸팬더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왔다.

'과거는 history, 미래는 mystery, 현재는 present'

이 만화가 이렇게 인문학적인 만화인 줄 몰랐다는..


'그래, 지금을 살자. 일단, 눈 앞에 늘어져 있는 이 삶을.

미래는 그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때, 또 그 때 책임지면 될 일.'



이런저런 아름다운 복안을 이렇게 뒤에 깔아두었기 때문에 이번 여정의 일이 이다지도 빡쎄고 고단했던가, 싶었다. 

아무튼 시작은 했으니, 이제 정말 나의 연고지로 돌아간다.(별일이 없으면-_-)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뉴욕에 들르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지난해, 지난 회사의 동료였던 분이 '지금 행복하세요?'라 물은 적이 있다.

그때는 '이 뜬금없는 일상화법이 아닌 질문은 뭐지? -_-'라고 잠깐 당황했었다.

그때 임기응변으로 내가 했던 답이 '24시간 불행하지 않고, 24시간 괴롭지 않고, 24시간 어렵지 않고, 대충 대부분의 시간이 좋으니 그냥 좋은 걸로 할게요.'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골스러운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함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42번가를 시골길 걷듯 익숙하고 편안하게 걷고 있는데 불현듯 이 얘기가 생각났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허를 찌르는 질문에 진심이 나오는 법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42번가 스타벅스의 공개 카메라에서 

2년 전에는 

잠깐 뉴욕에 여행왔던 그녀와 이런 사진을 찍었었고 한동안 이 사진이 공개되어 떠돌아 다녔었다.

이 익숙한 곳이 오늘 꽤 마음에 든다. 





오늘 저녁은 학교 앞에 리코타 샐러드와 치킨랩을 먹으러 간다.

이제 곧 오랫만에, 귀신 나올 것 같은 할렘 방향으로 달리는 빨간선을 탈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사는 나도 1호선, 미국에 살던 나도 1호선을 가장 많이 탄다. 하하하.


약속한대로 돌아가면 맛있는 밥 한끼 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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