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

lifelog 2015. 8. 26. 17:30

 

1.

한글이름과 다른,

외국에서 쓰는 이름이,

이제는 한국에서조차 누군가 그렇게 부른다고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여권이름과 사원증 이름(사용하는 이름)이 달라 그동안도 짧은 해프닝이 몇번 있었는데 오늘 다시 비슷한 일을 겪고나서 생각했다.

이름이 두개인 것처럼 지금의 내 삶도 두개인가..?

 

'맘껏 불러! 지금부터 내 이름은 E야.'

생애 첫 배낭여행에서 수중에 있던 전재산을 소매치기 당했을 때

나를 구해 준 영국인 친구 E에게 내가 베푼 최고의 선물이 지금의 내 이름이다.

당시 녀석은 굉장히 보고싶지만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그때, 그것이 내가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실컷 부르라~'

지금, 나의 정체성의 한 축이 되었다. 생은 역시 예측불허다.

 

그리고 이번 주말 내내,

동명이인 Y가 이 낯선 도시에서 정착할 집을

내 귀한 시간을 쪼개 같이 보러 다녀주는 도움을 댓가로

나는 그리웠던 옛 이름을 실컷 불렀다;;;


외국에서 회사를 다니거나 유학 등의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여권 이름 변경이 가능한데

한국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 등 포함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며 미루고 있다.

 

사실, 요즘의 나는 많은 것들을 미루고 피하고 있다.


그나저나 김춘수.. 얼마나 통찰력 있는 시인이던가...;;

고전이란~

 

 

2.

지난해 미국인 친구 D가 한국의 한 대학병원의 교환교수로 왔을 때

아파트를 구하고, 각종 가구와 집기들은 채우는 일을 도왔었는데

그때 백화점이면 백화점, 가구점이면 가구점에서 만난 거의 대부분의 점원이 거의 빠지지 않고 같은 얘기를 물어봤었다.

'와.. 국제결혼 하셨어요?' ㅡㅡ;;;

지난 주말 뉴욕에서 한국인 친구 Y의 집을 구하러 다니고 바니스에 식기류와 침구류를 사러 다니는 모든 순간에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까지 하는 우리에게 누구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ㅇㅅ'의 삶과 'ㅇㄹ'의 삶은 글자 모양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3.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건, 비유나 은유 같은 미사여구로 돌려 말하기에 부족한 언어때문이고,

니들 기준 무시무시한 시간에 출근하는 이유는 너무나 근면한 한국인이어서라기 보다는, ready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페미니스트냐, 모든 데이트를 거절하느냐... 소리를 듣는 것은, 피앙세가 있어 그렇다 등등.

..이런저런 질문에 구.구.절.절. 답했다.

에디의 말을 빌리자면, 이 동네 홉스테드 5차원에서 말하는 그 low성향 아니던가,, 개인주의는 어디갔느냐;;


이 정도 했으면 인터뷰 요청은 좀 철회해 주시라,

나는 도도한 사람이 아니고 그냥 수줍은 사람이다.

 


4.

'낯선 동네에서 집구하기' 뭐 이런 제목으로 책써도 되지싶다.

전 세계 몇 개의 도시에서 잠깐 살 집을 여러번 구해봤다.

그런데 정작 가장 오랜시간 살아 온 땅에선 '엄마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못한다.

 

 

5.

지난 저녁 V 부부와  저녁을 함께했다.

처음 태국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을 때는 그들의 이름을 듣고 놀라곤 했었다.

보통 자신의 이름 발음이 어렵다 생각해서 외국식?으로 바꾸려고 영어 이름을 따로 짓는다는데 이름이 무척이나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저녁을 함께 한 친구의 이름은 비너스다.

그리고 그의 친구 중엔 피아노와 킹, 나이트도 있다;;;

내 친구들만 특별히 유난하다거나 그들이 코믹 꿈나무인 것은 아니고 뭐.. 일종의 문화 같다.

근래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해서 꽤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데 정신 못차린 나만 이름 부를때마다 빵빵 터지는거지.

 

하지만, 기대된다. 이 부부의 미래.

꽤 근사한 꿈을 꾸고 있다.

 

 

6.

제이슨과 랭귀지 익스체인지 중이다.

제이슨은 한국어로 나는 스페인어로 더듬대며 대화한다.

간만에 첼시마켓에 태국요리를 먹으러 갔는데 습관처럼 이러고 있다가 한국인 관광객 단체를 쉴새없이 만났다.

잠깐 멈칫했다.

 

이중생활은 생각보다 품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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