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가을 제주

lifelog 2015. 9. 17. 13:42


1.

제주에 갈때면 거의 문여는 시간쯤 들르던 단골 다방이 있었는데 이번에 갔더니 문을 닫았다.(상해서 날라갔는데 ㅡ.ㅡ)

개인적인 사정이라던데 조금 더 알아보니 무슨 공중파 미식 방송에 방영되고 난 후유증인 듯 했다.

나의 즐겨찾기 목록이 또 하나 줄어들었다. 요즘 부쩍 익숙한 것들과 이별이 잦은 듯;

이곳은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진만큼 공기마져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밀려드는 인증샷 인파덕에 패스트푸드 같은 대응을 하자니 버거웠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근래 제주가 전반적으로 그런것 같다. 제주에 느림을 찾아 방문하는 까닭에 지난 몇년 간 남원부터 시작해 월정, 애월, 평대..등이 차례로 나의 즐겨찾기목록에서 빠져 나갔다.

이러다 하나도 안남으면 어쩌지, 생각했다.

다행히 제주를 뻔질나게 다녀 풍림 못지않은 커피를 만날 곳을 몇군데 더 알고 있다.

그 중에 하나도 또 이름이 바람이다.


바람에 앉아 예가체프를 앞에 두고 헤밍웨이를 생각했다.

그의 글, 나의 모히토는 라보데기따에, 나의 다이끼리는 엘플로리디따에.(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사실 쿠바 아바나에서 제일 맛있는 모히토를 파는 곳은 라보데기따가 아니다. 다이끼리도 그렇고.

오히려 비싸고 맛도 없다, 오너가 바뀌었으니 그럴만한 일이다.

하지만 술이라면 일가견 있다는 이 할아버지를 따라 세계를 돌다보면 라보데기따에서 한잔이 마치 성지순례 같이 느껴진달까?

이건 싱가폴 슬링의 래플스 호텔같은 그 정도의 당김 따위가 아니다, 빠리의 되마고나 플로르를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역시 브랜드의 힘은 스토리에서 나오는게 맞다.

다음생에 혹 셀러브리티가 되면 그때는 '나의 예가체프는 바람에'라고 상상을.. ㅋㅋㅋ

(헤밍웨이 얘기에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람의 예가체프는 최고였으니!)


풀시티 로스팅을 선호하긴 하지만 미국 애들이 워낙 한쪽 취향이라 다크다크한 커피들만 몇달 주로 마셔댔더니

간만에 예가체프, 따라주, AA를 미디엄 로스팅한 핸드드립들에 며칠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이런 장소엔 혼자가서 먼산보며 앉아 있는편이라 누굴 동행한 적이 없는데,

이번에 커다란 곰솔을 보며 바깥테라스에 앉아 맞담배를 피고있는 커플을 보자니 뭔가 보헤미안의 자유가 느껴져 살짝 부러웠달까.

아쉽지만 담배는 피워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니 아마 못 해볼 풍경이지 싶다.


그리 특별하진 않지만 이런 소소한 이벤트, 아.. 정말 충분했다.



 

 

2.

제주에서 가장 선호하는 숙박지는 중문의 끝자락 구석에 있다.

모두가 그곳의 장점으로 꼽는 View도 물론 좋지만 사실 진짜 비밀은 밤이 되어야 알 수 있다.

해가진 뒤 캄캄하고 고요한 밤에 높은 층 바다방향의 객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파도소리가 창문을 넘어온다.

그 소리를 BGM 삼아 치킨 한마리를 시키먹으면.. 아~

그런데 이 리추얼이 이번에는 불의의 이유로 그 직전에 불발되었다. ㅠㅠ

대신 야밤에 맥주 한캔을 들고 호텔 정원에 나갔다.

치맥을 아쉬워하며 벤치에 앉아 달님과 건배하고 한잔하는데 친구끼리 여행왔다는 190cm는 되어 보이는 독일 남자 둘이 말을 걸어왔다.

 

D2: 오~ 바이엔슈테판

E: 오~ 그래,, 헤페지

D2: 독일 맥주 좋아해?

E: 요즘 좀 밀맥에 꽂혔달까,, 너흰 제주 좋아?

D2: 응 아름다워, 그런데 한국어를 조금 알고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아, 말이 하나도 안통했어, 여러번 시도는 해봤지만 우리가 두문장이 넘는 대화를 하는 첫 동양인이 너야, 컨시어지 빼고,, 하하하

E: 그렇다면! 호스텔에서 지내봐. 거기가 친구가 많을 걸.

   근데 소셜커머스나 호스텔부커스 같은데서 예약하면 거의 잠만 자는 호스텔일 수가 있는데 니들이 네이버를 뒤질 수도 없고 참.. 

   그나저나 내가 아는 독일인들은 먼저 말 잘 안 걸던데 오~ 적극적인걸~

   자, 좋아. 궁금한거 또는 궁금했던거 그리고 못알아 들었던거 다 물어봐 지금부터 1시간은 놀아줄 수 있어.

D2: 버스탈때 요금을 내는게 어려워서 버스카드를 구입해서 쓰는데

    처음엔 안 그랬는데 어제부터 카드를 태그하면 '장해기 푸석..' 뭐라고 하는 기계음이 나오는데 

    그럴때면 기사가 내리라고 손가락을 문밖으로 가리키거나 짜증을 내면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서 세번 그런 뒤에는 그냥 택시 타고 가이드북을 보여줬어

E: 대충 때려 맞춰 보건데 카드 잔액이 부족한거 같다,, 있다가 같이 확인해보고 충전하자.

D2: 제주 어디가 좋아?

E: 관점에 따라 다른데.. 너희는 처음 와봤으니까 걍 너희 가이드북에서 니들 끌리는데 가봐, 취향은 누가 만들어 주는게 아니니까

D2: 너는 여러번 와봤어? 제주?

E: 응 일년에 서너번 와

D2: 그런 넌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아?

E: ..... 어디가 제일 좋으냐, 물으면 

  김녕/월정리/세화해변부터 수월봉 낙조, 동문에 오메기떡, 협재 앞 뚝배기 집, 오일장, 산방산, 용오름/다랑쉬...등 쫙 다 좋다 읇어주려했는데, 

  어디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니...

  음.....

  ......

  비오는 비자림.

  근데 지금은 날이 좋으니 거기 말고 사려니숲길 가.

  비자림은 다음에 애인이랑 다시 와서 비오는 날 가는 걸로~ 제주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네? 로마의 트레비 같이, 하하하

  옆에 있는 이 건장한 친구한테 빠져들면 곤란하지 않겠어?

  널 이성으로 느껴준다면야 뭐 좋겠지만, 

  쟤 표정을 보니 왠지 비극적으로 끝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경험상 비추다 비추 하하하

D2: 하하하 내일 뭐해? 우리랑 동행하지 않을래?

E: 나 낼 한라산 정복하러 가는데? 오랜 숙제야, 하늘 파란 제주를 간만에 만났으니 이번에 해야돼.

  게다가 저녁 비행기로 상해로 돌아가야 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등반할건데 그래도 좋으면 따라와도 돼!

D2: 앗! 우린 너 한국사람인줄 알았어!!

E: 맞아 한국사람. 상해에 출장 간 뉴욕에 사는 한국사람.

   아.. 기분좋아,, 술이 모자란데 버스카드 충전도 할겸 편의점가자. 맥주는 내가 사지.

   이 근처에 무려 에딩거, 바이젠, 블랑을 모두 파는데가 있다고.



3.

관음사 코스가 낙석으로 폐쇄되어 성판악 왕복으로 백록담을 밟았다.

수없이 제주를 갔지만 한라산 등반은 처음이었다.

돌산이라 오르기 어려웠다. 정상 거의 직전까지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정상을 앞두고 200여 미터 나무데크 길은,, 정말 천국 같더라.

하지만 뭇 사람들의 말처럼 그로인해 장시간 산행이 다 잊혀졌느냐??? 모르겠다, 힘들었다 ㅠㅠ

남자 페이스로 진달래 대피소까지 2시간반, 거기서 백록담까지 1시간반, 편도에 총 4시간 잡는다는데 과장인듯 싶다.

왜냐면 난 진달래 대피소까지 2시간, 백록담까지 1시간 10분, 그리고 백록담에서 20분 멍때리고, 하산에 3시간 걸렸으니까.

왕복 6시간 30분.. 그래서 다리가 작살이 났나.....

진달래 대피소를 12시30분까지 통과하지 못하면 당일 백록담은 못간다. 입산통제하거든.



 

4.

내가 백록담에 갔던 날 H사 신입사원 수백명 단체도 백록담에 왔다.

한국서 회사 다니던 시절에도 가끔 단체 산행이 있었는데 사실 그때도 잘 이해가 안갔었다.

왜 단체로 산에 가는건지. 음.. 생각해보니 얘들도 대부분 공대생이겠구나 ㅡ_ㅡ

그 옛날 그 방식이 아직도,라며 이래서 창조경제가 되겠냐 혼자 궁시렁 대고 있었는데 남자셋 무리와 섞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내가 입은 티와 바지가 얘들 단체복이랑 깔맞춤한듯 색이 같았다, 덴장..


'으왓, 죄송합니다! - 너 일부러 그랬지? 가방을 왜 남에 컵라면 위에 던졌냐 이 자식.-_- 제가 다시 사다드릴게요 잠시만요 - 괜찮아요 - 아니 다시 사드릴게요 - 진짜 됬어요 원래 국물 안 먹어요 우리 쓰레기 더 만들지 말아요 ㅎㅎ - 정말 죄송합니다 - 별말씀을'


잠깐 흠짓했지만 결국 외로운 산행을 그들과 함께 재미있게 했다.

땅바닥만 보고 걷는 길에서 얘들은 정말 운명같았다 ㅠㅠ


'D사의 인적성은 에잇 D사쯤, 생각하고 준비도 안하고 봤는데 어처구니 없게 되게 어려웠다.'

'D엔지니어링은 면접을 10시간이나 보더라. 변태같은 회사 붙어도 가지말아야지 생각했다.'

'사실 K사 면접이 잡혔는데 고민이다.'

'S사 인적성을 보는데 시험지에 표시하지 말고 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손을 뒤로하고 보라고 했다. - 하하하 진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 뒤로하고 봤지 뭐, 답안지에 입으로 펜잡고 마킹할뻔 했다니까 -  하하하 미쳐'

'어젯밤에 보니 구매부장님이 호탕하고 좋아보이더라. 구매지원할까?'

'영업소로 돌면서 경력을 쌓는게 나중을 위해서 낫지 않을까? 우리 같이 영업소 갈래?'

'나는 이렇게 활동적이고 운동 좋아하는 여자가 좋은데 - 너, 이뻐서 그러는 거지? - 응 - 하긴 일단 이쁜게 먼저지ㅋㅋ '

'오늘 밤에 장기자랑 뭐해? - 그 개콘 XXX - 연습 많이 했어? - 형, 개그는 연습으로 되는게 아니에요. '

'외국은 연봉 얼마나 줘? - 우와 - 학교 어디 나왔어? 전공 뭐했는데? 어떤 경력 쌓은거야?'

'아 진심 백록담에 물 부어주고 싶다, 완전 소양강댐이네'

'나 방금 카톡으로 자랑했어, 여자친구한테. 백록담 왔다고. 뻥치지 말래 ㅋㅋㅋ'

'너무 나이차 많이 나는 것도 별로 안좋은거 같아 지가 잘못해서 싸워도 결국 내가 풀어줘야 해. 계속 이러니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 여기 오기전에도 싸웠어 이번엔 정말 내가 먼저 전화 안할거야 거의 끝난거 같어 - 몇살 차인데? - 6살 차이, 3살 정도 차이가 말도 잘 통하고 좋을거 같은데 그럼 여자 나이가 무려 20 후반이야 아유 나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지? - 나도 내가 언제 이렇게 먹었나 싶다 - 엥? 몇살인데?? - 니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반말하는게 당황스런 나이지, 짜샤, -_- 누.나. 이제 다리 아프다 - 헉 예,, 업어 드릴까요?'

'XXX....XXX... 화이팅 화이팅 와~~~ - 우리 팀도 할까? - Oh my days, 난 저기 외국인들과 있다가 먼저 하산하면 안될까'


거의 듣기만 했는데 재미있었다.

밝고 에너지 넘치고 쉴새없이 화제가 있어 말을 한다.

옛 생각이 났다. 우리때보다 숫자에 매기는 가치가 조금 더 커지긴 했지만 거의 두루두루 비슷해 반가웠다, 내 어린시절이.


가끔 '아.. 공대생 어쩌구..' 하기도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난 꽤나 이 집단의 성향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일생 제일 재밌있었던 축구도 2002 월드컵이 아니고 FC S...컵이었다는..

투박하고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면도 사실은 순수해서 그렇다 생각하고 있다. ㅋㅋ 



5.

제주에 알려진 어트랙션 중 나도 가끔 가는 곳이 몇 곳 있는데 두모악으로 불리는 김영갑 갤러리가 그 중 하나다.

오름 사진을 보려고 가는 것은 아니고(그도 그럴것이 갈때마다 줏대없이 좋아하는 오름 사진이 매번 바뀐다)  

그 뒤뜰에 앉아 있으려고 간다.

그래서 사진을 감상하진 않지만 그 공간 자체가 없어지길 바라지 않으므로 기부하는 마음으로 늘 입장료를 낸다.




또 다른 곳은 섭지코지 가는 길에 있는 신양리.

이제는 중국인지 한국인지 알수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괜찮은 섭지코지.

난 그 섭지코지 가기 직전 신양리 삼거리 해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뒷통수가, 가끔은 일출도, 그렇게 좋더라.



6.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나갈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짐싸기는 

멋진 드레스도, 아름다운 구두도, 피부를 지킬 화장품도 아니다.

'이번엔 무슨 책을 들고 갈까'

사실 아이패드에 전자책이 3만권이 넘게 들어있지만 꼭 한권의 종이책을 챙겨드는 것은 중요한 리추얼이다.

혼자하는 여행을 즐기는 까닭은 책과 함께할 이 빈 시간을 찾는 방식이 더 우아해서 일지도 모른다.

일정을 마치고 혼자 침대에 남겨졌을때에야 잡을 수 있는 책을 파란 공원 같은데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잡을 수 있게 하니까.  

이번에는 이미 오래 전 작고하신 '수탑'님의 글과 함께 했다.

좋은 노래가 그러하듯 좋은 글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촌스럽지가 않다.


그래도 이번에 아이라이너를 짐에 넣지 않은 것은 유감 -_-



7.

우연히 만난 독일 친구들이 제주에 환상적인 말레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가 있어?,라며 별 기대없이 해질무렵 들렀는데 '와,,'

아바나의 말레꽁 못지 않았다.

걸터 앉아 맥주한잔 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음식물섭취 금지 표지판과 걸터 앉을 수 없게 만든 뾰족한 방파제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풍림이 빠진 자리에 새로운 즐겨찾기 추가.



8.

아침에 호텔을 나서면서 눈 앞에 펼쳐진 바다에 알수없는 느낌이 들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 자리에서 10분, 20분이 지나니까 그 장면이 금새 익숙해졌다.

'헉.. 이 바다' 에서 '바다구나..'로 감정이 변하는데 20분밖에 안 걸리더라.

매번 공항에 가서 라운지에 앉을 때면 눈 앞에 보이는 비행기에 '이 낯선 설레는 풍경' 하다가 곧 '목적지까지 순간이동'을 희망하게 되는 것처럼.

이 감정의 시퀀스를 늘 잊지말자고, 라운지에 앉아 셀카를 남기는데 진동을 꺼둔 걸 잊은 바람에 '찰칵' 소리가 너무 크게 난거지.

순간 집중, 덴장.

수트에 브리프케이스를 든 중년남들 속에 주황색 테니스 치마를 입은 애어른이 되어버렸다. ㅡㅡ;

 



9.

걷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스페인의 산티아고도 걷다가 중간에 차로 건너 뛰었고,

제주를 그렇게 왔어도 작정하고 올레길 걷기를 해본적도 없다.

언젠가 한번은 올레길 나도 걸어야지,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김녕 벽화길을 걷고 나서 깨달았다.

내 취향에 맞는 곳을 산책하는 걸 즐기는거지 올레 몇길, 몇길을 걸었다 같은것에 별 감흥이 없다는 사실을.



10.

사진을 다 블랙베리로 찍었더니 네모네모한게 꽤 마음에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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