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찬사

lifelog 2014. 7. 14. 23:19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몸이 아픈 아이에게 바닷속을 보여주는 일 따위가

그 아이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일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병이 빨리 낫는 것과 덜 고통 스러운 것, 그리고 치료에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다이빙을 시작한 후로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시밀란이 열렸을 때 보다 ,

시파단에서 바라쿠다떼를 만났을 때 보다,

팔라우의 블루코너나 필리핀의 베르데아일랜드를 맨눈으로 봤을 때 보다,

녀석의 눈을 통과해 사진으로 보여지는 그 바다에 넋을 잃고 말았다.

내가 찍은 바다와 나를 찍은 사진을, 내가, 처음보는 것처럼 감상하는 기분이라니.


"누나! 인어 같아요! 정말 예뻐요!"

'아.. 누나는,, 연하는 부담스러운데,, 하하하'


7살 짜리의 과분한 찬사에 너스레로 분위기를 방글방글 노랑색으로 물들이려는 찰라 녀석이 얘기한다.


'우와 바다속은 이렇게 예쁘구나. 종양이 시신경을 누르고 있어서 제거 수술후엔 혹시 눈이 안보일 수도 있대요.'

"준우!! 다 나으면 같이 가쟈! 누나가 알고 있는 곳 중 가장 멋진 곳에 데려갈께."

'약속하는 거죠? 헤헤.. 근데 저는 괜찮아요. 여기에 오래 입원해 있는 애들 중에는 어린이집도 안 다녀보고 바다도 못본 애들도 많아요.'


너무 일찍 중요한 것을 잃어서 너무 빨리 자라버린 아이의 말에 나는 다음 말을 잃었다.

분명히 뭐든 얘기해야하는 타이밍인데 말을 고르느라 머리속이 복잡했고, 결국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일은 나에게 약간 무리였다. 진심이 담기려면 먼저 이해해야 하는 거니까.

나는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고(차라리 달동네에 연탄을 나르는 몸쓰는 일에 더 자신이 있다),

착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아무도 모르게 몰래 하지 않고는 오글거리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다,

25~7살 때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이 매년 벌이던 자선바자회의 수혜 주인공인 6살 원이가 4차례의 수술끝에도 결국 죽고 난 후로는 더더욱

병은 위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결론 내렸고,

이 결론은 내가 한때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했던 사건을 계기로 더 굳어졌다.

극복은 셀프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금전적인 후원이라고.


그런데 녀석이 말을 이어갔다.

'누나 또 올거져? 누나 여행 많이 한다면서요,,

 바다 속 사진 말고 다른 멋진 곳들 사진도 있죠? 다음번엔 그거 보여주세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고, 난 불현듯 깨달았다.


다쳐서 병원에 몇 주 누워 있던 그때,


다시 곱씹어 보니,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위안과 안도는,

지금의 내 상처가 치료될 만큼 충분히 의학이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과,

나에게 최고의 의료진이 붙어 있다는 사실,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침대 옆에서 쪽잠을 자는 엄마, 아빠,

입원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내 얼굴을 보러 오는 MG, GT, SH,, 이 녀석들 이었음을.


당시 나에게 가장 큰 두려움도 '도대체 얼마나 다친거지? 나을 수는 있는거야?'보다는 '예전이랑 똑같이 살 수 있을까?'였다.

늘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모자르고 이게 이만큼만 더 있었으면 좋겠고 저걸 저만큼만 더 잘했으면 좋겠었던 내가,

며칠전의 나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외모에 큰 자신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안와골절로 오른쪽 눈 언저리가 약간 변형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이야기에 며칠을 잠을 못잤었다.

(사실 눈이 좀 들어 갔으면 이뻐졌을지도 모를일이다.. ㅡ.ㅡ)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내 얼굴을 정말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내가 생각보다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다행히(?) 결국 얼굴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그때 사고 발생지점 근처 시골 종합 병원의 응급실 당직의가 이빈인후과 인턴이었던 관계로 삐뚤빼뚤, 엉망징창으로 이마를 17바늘이나 꿰맸는데

집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기고 나서도 전문의의 흉터 성형 권유를 한사코 거부했고, 결국 그 흉터는 이마와 머리 경계 언저리에 희미하게 훈장처럼 남았다.


준우에게 위안은 수술 전 한번 더 녀석을 보러 병원에 가주고 다 나아서 같이 다이빙 갈 수 있다고 믿어주는 걸로 충분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지난 토요일 동해의 다이빙은 가시거리가 불과 5미터도 안되었었다.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쨍한 바다는 없고 수초가 몸을 감았고 생각보다 물도 차가워 싱겁게 일찍 마무리를 했었다.

나는 그날 밤에 에디가 주최하는 소아암 후원 자선 음악회에 바텐더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고 그래서 함께 다이빙을 했던 친구들을 음악회에 초대했다.


제각각의 사람이 모였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트럼펫을 공부한 K,

줄리어드에서 플룻으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H,

음악감독 M,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하고는 한국에서 파스타집을 하는 G,

경영컨설턴트이자 투자역 E,

전자회사 연구원 W,

그리고 나,,, 등의

음악회 재능기부 인원들과

 

거기에 더해+


다양한 직업을 가진 나의 다이버 버디들을 포함한 각양각색의 수십의 지인 게스트들.

 

모금이라는 1차적인 목적은 시작과 동시에 마무리되고,

음악을 윤활유로 해서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와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유쾌한 사교가 이어졌다.

마침 다이빙을 마치고 온 우리는 아쉬웠던 다이빙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전세계 멋진 포인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무용담처럼 끊이질 않았고 

그 이야기에 갑자기 몇해 전 동남아를 돌며 다이빙하던 때가 그리워져 집에 와서 외장하드에 보관했던 사진들을 심심할때 보려고 태블릿으로 옮겨 담았다,


어제 에디와 준우를 보러 갔을 때 마침 수술 스케쥴이 잡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불안해하는 녀석을 위로하고 싶어서 마침 태블릿 사진을 꺼내든 거였는데,

결과적으로 오히려 위로도 내가 받고 깨닫기도 내가 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게 얼마나 가치있고 중요한 것이었는지, 같은...

아주 상투적이고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말이다.




7살짜리가 불러주는 '누나'라는 최고의 찬사에 혹해서 몇해 전 그때의 11자 복근이 사라진지 오래라는 말은 비록 비밀로 했지만(-_-),

어제 병원에 갔던 여운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 이 중요한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며 오글거렸다 뿌듯했다,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파벳 M, S, G 피어싱.. 팅커벨 피어싱.. 하와이언 피어싱을  샀다.

내가 가진 귀한 것들에 감사하며.






그리고, 후원에다 재능기부도 모자라 병원까지 날 몰아 넣은,,

에디의 은색베엠베의 커다란 바퀴도 당분간 살려두기로 했다.

La verdad es que, se lo agradezco sinceramente. 





다만, 당분간 다이빙은 못 할 것 같다...

내일부터 아웃커츠엔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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