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신은 나를 어지럽게 하네요
태어남과 동시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이 얘기가 이 아이에게 재앙이었을까? 아님 축복이었을까?
법조인 집안에 태어나 법조인이 되거나, 사업가 집안에 태어나 사업을 물려 받거나, 목수의 자식으로 태어나 목수가 된다든지,
국가고시처럼 한번만 결정하면 다시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든지, 이미 정해져 있다면..
분명 외모가 아직 풋풋한 그였지만 눈빛만큼은 제대로 섹시한 어른의 눈이었다.
이 호기심 가득한 에스파뇰은 내가 한마디 건네자 내 테이블로 와 폭풍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정해져 있는 삶을 산다."
어쩌면 선택은 두려운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급기야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안정이라 부르는 것이 요즘의 대세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조기교육은 중요하다.
어렸을때부터 나의 테이스트라기 보단 부모의 테이스트대로 자라나기 때문에 선택에 더 어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이야말로 바로 학습의 가장 큰 효과 아니던가.
"니가 지금 정말 원하는게 뭐야?"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바꾸지 않고 그냥 그 길을 따라 가기만 해도 내 삶이 풍성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안전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무의식이 생각한다.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 마치 고흐 그림에 모네가 색을 칠한 듯 뭔가 어색 느낌이었다.
초록색 풋사과가 빨간 립스틱을 바른 느낌?
하지만 곧 깨달았다.
사실은 벤타스에서 불파이팅이 끝나고 흘리던 죽은 소의 붉은 피 만큼이나 상큼한 초록에 농염하게 녹아든 강렬하고 확실한 그의 존재감을.
O :
'나는 내가 결정할만큼의 자아가 성장하지 않았을 때 이미 삶이 정해져 있었어요. 내가 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했고요. 욕망도 없었죠. 그냥.. 하는 거에요. 나는 태어날때부터 이렇게 될 거였거든요. 하지만 지금의 저, 당신이 보기에 어떤가요? 지금의 비즈니스, 꽤 잘하죠? 왜 묻냐고요? 요근래 욕망이 생겼거든요. [선택할 수 있다]. 자.. 저는 지금 일생일대의 선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운명같이 나타난 내게 상당히 자극적인 당신. 자.. 말해봐요.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내 앞에 있는 당신. 겨우 내 또래로 밖에 안 보이는 당신은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있나요? 당신은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E :
"일단, 미안합니다. 나는 전혀 당신 또래가 아닙니다. 당신 나이에 나는 무서운게 많았어요. 나에게서 격려를 얻는다면 영광이지만 나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과 반대입니다. 모든 선택권이 주어진 인생을 살지요. 그리고 오랜세월 때때로 아니 자주 그 권리를 여기저기 양도하며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선택을 욕망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저도 저에 대한 욕망이 생겼죠. 그래서 지금은 뒤늦게 자아성찰중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만 할 것을' 선택했고 여기에 있습니다."
O :
'무엇이 당신을 선택하게 하나요?'
E :
"호기심. 나에 대한,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하하"
O :
'그럼 먼저 선택한 당신이 말해봐요. 가장 적게 잃으면서 선택하는 방법은?'
E :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떤 일이라도 동시에 벌어질 수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아인슈타인이 그랬대요. 그 천재가. 당신은 지금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저도 '효율' 그것이 삶의 이슈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아니었어요. 실은, 적게 잃거나 많이 잃는 것 따위의 선택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기에 내가 원하는게 나올때까지 쉬지 않고 선택을 시도할 뿐이지요. 다행히 나는 아직은 그 선택들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를 가졌고요. 시간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입니다. 다행입니다. 당신이 한국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재테크는 하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등의 리얼리티와 이 얘기를 접목하지 않아도 되어서.ㅋㅋ"
O :
'오늘 이 테이블의 밥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술도 한잔 사고 싶군요. 내 선택이 빛을 발하는 날 당신은 아마 나를 다시 볼 수 있을거에요. 감사합니다.'
E :
"당신은 나를 어지럽게 하네요."
이렇게 추운 한국땅에 따뜻한 나라의 그가 왔다. 갑자기.
묄벤의 인터뷰 초안을 바쁘게 작성하고 있는데 불현듯 걸려온 그의 전화에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지금 도심공항터미널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잊고 있었던 수 많은 아찔한 추억들이 하나의 선을 이루며 연결된다.
시시한 세상은 없다.